신라 말 학자 고운 최치원의 위패를 모신 정읍 무성서원

최치원이 태산군(정읍 지역의 옛 지명) 태수로 부임해 선정을 베풀고

이성훈 | 기사입력 2019/09/29 [11:40]

신라 말 학자 고운 최치원의 위패를 모신 정읍 무성서원

최치원이 태산군(정읍 지역의 옛 지명) 태수로 부임해 선정을 베풀고

이성훈 | 입력 : 2019/09/29 [11:40]

[이트레블뉴스=이성훈 기자] 신라 말 학자 고운 최치원의 위패를 모신 정읍 무성서원(사적 166호)이 지난 7월,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됐다. 이번에 유네스코 세계유산이 된 한국의 서원은 정읍 무성서원, 영주 소수서원, 안동 도산서원과 병산서원, 경주 옥산서원, 달성 도동서원, 장성 필암서원, 함양 남계서원, 논산 돈암서원 등 9곳이다. 

▲ 정읍 무성서원의 강학 공간인 강당    


무성서원은 최치원이 태산군(정읍 지역의 옛 지명) 태수로 부임해 선정을 베풀고 떠나자, 백성이 세운 생사당(生祠堂) 태산사가 뿌리다. 생사당은 감사나 수령의 선정을 찬양하기 위해 그 사람이 살아 있을 때부터 제를 올리는 사당을 뜻한다. 조선 중종 때 태인현감으로 부임한 영천 신잠의 생사당이 태산사와 합해졌다. 이후 태산서원으로 불리다가, 1696년(숙종 22) 사액 받아 무성서원이 됐다.

 

▲ 무성서원의 뿌리가 된 태산사


무성서원은 불우헌 정극인, 눌암 송세림, 묵재 정언충, 성재 김약묵 등을 추가로 배향하며 성장했고, 흥선대원군의 대대적인 서원 철폐에도 살아남으며 역사적·학문적 가치를 증명했다. 당시 전국의 서원 47곳이 화를 면했는데, 전라도에서는 무성서원과 장성 필암서원, 광주 포충사뿐이었다.

 

▲ 무성서원의 역사를 오롯이 기록한 현판  


서원은 조선 시대 학문과 제향을 위해 사림이 설립한 사설 교육기관이다. 향교가 지방의 국립 교육기관이라면, 서원은 지방의 사립 교육기관인 셈이다. 서원은 향교와 달리 각 지역의 선현을 모셨고, 독자적으로 운영했다. 중종 때 풍기군수 주세붕 선생이 경상도 순흥면 백운동(지금의 경북 영주 지역)에 만든 백운동서원이 시초로 전해진다. 지금 우리에게 소수서원으로 익숙한 백운동서원은 이황의 건의로 사액 받으며 얻은 이름이다.

 

▲ 제향 공간으로 들어가는 내삼문은 서원 건물 중 유독 지붕이 낮다    


사액서원은 정부에서 토지와 노비를 내리고, 세금과 역을 면제해주는 등 전폭적인 지원을 받았다. 서원이 늘어가며 사액서원도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그 수를 줄여야 했지만, 이미 거대해진 서원은 힘이 막강했다. 흥선대원군이 서원 철폐라는 칼을 꺼내기까지 조선은 서원의 나라였다.

 

▲ 숙종 때 사액서원으로 다시 태어난 무성서원    


고종 때 과거제도가 사라지자, 입신양명을 위한 교육 공간으로 출발한 서원은 성리학을 탐구하는 학문 공간으로 변해간다. 서원이 출세와 직결되는 공간에서 벗어나, 경치를 즐길 수 있는 풍수지리 좋은 곳에 자리 잡은 연유다. 지금 우리가 서원 하면 풍광 좋은 자연을 떠올리는 것도 이 때문이다. 하지만 무성서원은 여느 서원과 달리 마을에 있다. 이를 두고 김은숙 해설사는 마을 속 서원은 신분 차별 없이 학문의 기회를 제공한 무성서원의 성격을 오롯이 드러낸다”며 “이곳은 모두에게 열린 학문 공간이자, 마을 사람들이 소통하는 공간이었다 고 설명한다.

 

▲ 무성서원은 마을 안에서, 백성과 함께 현실을 마주하며 학문에 힘썼다  


앞으로 개울이 흐르고 뒤에는 성황산을 등진 칠보면 무성리 원촌마을. 잠시 지도를 살펴보면 무성서원을 필두로 서원과 사당이 제법 많다. 조용한 마을에 유교의 흔적이 왜 이렇게 많을까. 여기서 최치원이 다시 등장한다. 신라 말 최치원이 이곳 태산군에 뿌린 유교와 풍류의 씨앗은 무성서원을 필두로 여러 서원과 향교, 조선 시대 최초 가사 작품 상춘곡으로 만개했기 때문이다.

 

▲ 조용한 원촌마을에 덤덤하게 자리한 무성서원    


무성서원에 들어서면 고직사와 현가루가 반겨준다. 당시 서원의 살림을 맡아 보는 관리인이 거주하던 고직사에는 현재 해설사가 머물며 길손을 반겨준다. 외삼문 대신 1891년에 건립한 현가루는 《논어》의 현가불철(絃歌不輟)에서 따온 이름이다. 어렵고 힘든 상황에도 학문을 계속하다라는 뜻이다.

 

▲ 외삼문 대신 건립한 현가루  


서원 내부로 들어서면 학습 공간인 강당, 영정과 위패를 모신 사우 태산사가 이어진다. 1828년 강당을 중수한 서호순의 공덕을 기리는 현감 서호순불망비와 비각도 자리한다. 강당은 좌우로 스승이 기거하던 공간이 있고, 중앙 마루 3칸은 앞뒤가 시원하게 트인 구조다. 덕분에 강당 뒤 태산사로 들어서는 내삼문이 한눈에 들어온다. 강당 전면에 걸린 현판이 1696년 사액 받았음을 알려준다. 현판 곳곳에 지워진 이름이 눈에 띈다.

 

▲ 태인 현감 서호순이 강당을 중수한 것을 기리는 공덕비와 비각


강당 중앙 마루 뒤의 내삼문을 열면 태산사다. 서원의 건물 중 유독 지붕이 낮은 내삼문에 들어가려면 고개를 숙여야 한다.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한 태산사에 들기 위한 절차일까. 고운 최치원을 중심으로 불우헌 정극인 등 7인의 위패를 모신 태산사는 말이 없다. 무성서원에서 멀지 않은 곳에 상춘곡으로 유명한 정극인의 묘와 재실이 있다. 벼슬에서 물러난 뒤 부인의 고향인 이곳 태인현에 터를 잡은 불우헌은 여생을 교육자로 살았다.

 

▲ 무성서원에서 멀지 않은 곳에 불우헌 정극인을 기리는 재실이 있다  


강당 오른쪽으로 기숙사인 강수재로 연결되는 협문이 있다. 강수재 앞으로 또 다른 비각과 병오창의기적비가 자리한다. 병오창의는 1906년 면암 최익현과 둔헌 임병찬이 을사늑약에 항거해 일으켰으며, 호남 최초의 항일 의병 운동으로 평가 받는다.

 

▲ 유생이 생활하던 강수재와 그 앞에 자리한 병오창의기적비


정읍을 이야기할 때 조선 근현대사의 핫 이슈, 동학농민혁명을 빼놓을 수 없다. 고부군수 조병갑의 폭정이 계속되자, 1894년에 전봉준을 중심으로 전라·충청 일대 농민이 고부 관아를 습격해 고부민란을 일으켰다. 정부가 조병갑의 횡포를 해결하겠다고 약속해서 해산했지만, 민란을 조사하기 위해 내려온 안핵사 이용태의 탄압이 이어지자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났다. 동학농민혁명기념관에 가면 불과 120여 년 전 이 땅에서 벌어진 동학의 모든 것을 살펴볼 수 있다.

 

▲ 동학의 모든 것을 볼 수 있는 동학농민혁명기념관    


동학농민혁명기념관 지척에 자리한 정읍 황토현 전적(사적 295호)은 동학농민혁명 당시 동학농민군이 관군에게 압승한 현장이다. 신무기로 무장한 조·일 연합군에게 우금치 전투에서 패하며 역사 속으로 사라지기까지 동학농민군의 항쟁은 계속됐다. 불합리에 항거하며 개혁과 민족 자주를 외친 동학농민혁명이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에 영향을 주었듯이, 현실에 뿌리내린 마을 속 무성서원에서 의병 운동이 일어난 것은 자연스럽고 당연하다.

 

▲ 황토현 전적에 있는 전봉준 동상  


이제 한 박자 쉬며 호남 제일의 정자 피향정(보물 289호)으로 가보자. 지척에 있는 연못에 지난여름 만개한 연꽃 향기가 나는 듯하다. 최치원이 이곳을 거닐었다는 설명을 들으니 그가 쓴 추야우중(秋夜雨中) 시구가 들려오는 듯하다.

가을바람에 괴롭게 시를 읊노라 / 세상에 나를 알아주는 이가 드물구나 / 밤이 깊도록 창밖에는 비가 내리는데 / 등불 앞에 있는 마음은 만 리 밖을 달리네. 백성이 생사당을 만들 정도로 실력과 인품을 갖췄음에도 육두품이라는 신분적 한계로 뜻을 펼치지 못한 최치원, 사람이 곧 하늘인 세상을 만들기 위해 싸운 동학농민군. 이들의 안타까움과 절절함을 품은 무성서원 이야기에 귀 기울일 시간이다.

 

▲ 최치원이 시름을 달래며 거닐었다는 호남 제일의 정자 피향정  


○ 당일여행 : 동학농민혁명기념관→황토현 전적→피향정→무성서원→김명관 고택

 

○ 1박 2일 여행 : 첫날_동학농민혁명기념관→황토현 전적→전봉준장군고택→피향정 / 둘째날_내장산국립공원→무성서원→김명관 고택


○ 관련 웹 사이트

 - 정읍여행(정읍시 문화관광) www.jeongeup.go.kr/culture

 - 동학농민혁명기념관(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www.1894.or.kr

 

○ 주변 볼거리 : 옥정호구절초테마공원(산내면), 정읍사문화공원, 전설의쌍화차거리 / 관광공사_사진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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