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마기행] 청해진(淸海鎭) 장도(將島)는 어디인가

청해진(淸海鎭) 장도(將島)는 어디인가 해상왕 ‘장보고(張保皐)’

심명숙 | 기사입력 2024/04/14 [13:10]

[테마기행] 청해진(淸海鎭) 장도(將島)는 어디인가

청해진(淸海鎭) 장도(將島)는 어디인가 해상왕 ‘장보고(張保皐)’

심명숙 | 입력 : 2024/04/14 [13:10]

[이트레블뉴스=심명숙 기자] 

청해진(淸海鎭) 장도(將島)는 어디인가? 

해상왕 ‘장보고(張保皐)’

 

▲ 장도 전경, 사진 완도군청     ©심명숙

 

완도 청해진 유적(莞島 淸海鎭 遺蹟)은 전라남도 완도군 완도읍 장좌리 734, 장도(將島)는 통일신라시대의 군진(軍鎭) 유적이다. 청해진은 한반도의 최남단에 있는 장도라는 섬으로 집중된다.

 

해상왕국이었던 장도는 장좌리 마을에서 180m 정도 떨어진 작은 섬이다. 마을 앞바다에 전복을 엎어놓은 듯 둥글넓적한 섬 장도, 1984년에 사적 제308장도청해진유적으로 지정되었다. 일명 장군섬이라고도 불리는 장도는 하루에 2번 정도 바닷물이 썰물일 때만 걸어서 들어갈 수 있었다. 지금은 목교(木橋)가 놓여져 관광객들이 아무 때나 드나들 수 있어 편리하다.

 

해가 뜨기 전에 아침이 일어나는 따뜻하고 조용한 곳, 완도는 남해(南海)의 중심이 되는 자연환경과 해산물이 풍부하여 부유한 섬이다. 썰물이 되면 반들반들 빛나는 개펄에서 게들이 달음질하고, 물가에는 파란 해초(파래)가 나폴나폴 춤을 춘다. 이렇듯 천혜의 자연환경 속에서 살고 있는 완도군민들의 생활문화가 넉넉한 곳이다. 고단한 생활 속에서도 행복한 섬사람들, 자연이 주는 풍부함 때문인지 사람들 인심이 후덕하다.

 

▲ 장도에서 바라본 장좌리마을   ©심명숙

 

오늘날 장도가 알려지기 전까지는 당산 외에는 아무것도 없는 무인도였다먼 옛날 동북아바다를 평정했던 해상왕 장보고의 청해진은 오랜 세월 동안 바다와 땅속에 묻혀 빛을 보지 못했다. 그러다가 1959년 사라호 태풍이 덮쳤다. 태풍이 섬을 할퀴고 지나간 뒤에 섬을 방어하기 위해 설치했던 잔존물들이 발견되었다. 수심이 얕은 섬 입구 쪽에 박아 놓은 굵은 통나무 목채(방어시설)들이 갯벌에서 드러나면서 세상에 나오게 되었다.

 

이후 1991부터~ 철저한 발굴조사와 사료조사 등을 거치면서 장보고의 활동 장소로 확인하게 되었다. 군민과 학자들의 노력으로 장도(장군섬)를 지키던 성곽과 건물들의 옛터를 일부 복원하게 되었다. 9세기 중반쯤 해상교역의 주도권으로 화려했던 당시를 엿볼 수 있는 기와, 토기 등의 유적·유물들이 발견되면서 청해진 유적지로 확인되었다.

 

▲ 장도를 둘러싼 성곽(토성)     ©심명숙

 

장도 유적지에는 목책을 설치한 흔적이 남아있다. 섬 둘레에 적의 공격을 저지하기 위한 외성과 두 번째 출입문 방어의 기능인 내성이 있다. ()의 총길이는 890m이다. 성곽은 돌과 판자로 틀을 잡아 흙을 기초로 하여 쌓는 판축기법으로 쌓았다고 한다.

 

청해진은 한반도에서 남해와 서해가 만나는 지점이며, 해상무역의 거점이 되는 항구로 바닷길의 요충이었다. 당시의 항해 기술의 한계 때문에 가능한 육지와 가까운 연근해 항로를 이용해야 했던 신라뿐 아니라 당-일본을 다닐 수 있는 바닷길이었다고 한다. 또한, 통일신라시대 삼해(三海)의 해상권을 장악한 장보고덕분에 해상교역이 활발했던 본거지로서 경제적 번영을 누렸던 중요한 유적지이다.

 

▲ 장도 안에서 바라본 외성문      ©심명숙

  

특히 인상 깊은 것은 성곽 밖에 있는 우물이다. 지금도 볼 수 있는 자형 판축유구(版築遺構)로 보호하고 있는 우물은 목교(木橋)를 건너 장도로 들어가는 입구에 있다. 옛 우물 중, 신라 경주지역에서 발견된 우물과 비교해도 규모가 크다고 한다. 식용수로 장도 성안에서 사용뿐만 아니라, 지나가는 선박()을 위해서도 식수로 사용했던 것으로 추정한다고 한다.

 

장도는 바다에 떠 있는 선상(船上)처럼 잔잔히 일렁인다. 섬을 둘러싼 토성은 자연지형의 능선을 따라 자연스럽고 부드럽다. 일직선으로 뻗은 성곽 돌출부 치() 위에 올라섰다. 밀물 때문인지 야트막하지만, 시야가 확 트인다. 관광객에게 전망대 역할을 하는 치()는 성벽에 접근하는 적을 쉽게 공격하기 위해 만들었다.

 

섬의 앞 바닷길이 외국으로 잇는 해상무역의 중요한 길목이란 것을 느낄 수 있다. 장보고는 남해 출신으로 이러한 요충지를 미리 알고 있지 않았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 절벽을 타고 오르는 적을 물리치기 위한 초소였다.      ©심명숙

  

장보고(본명 궁복)는 평민 출신으로 9세기경에 활약했던 무장이자 무역상이다. 출생지와 생년월일에 대한 기록이 없지만, 수영을 잘한 것으로 보아 섬이나 서남해안 출신으로 추정한다. 20대에 당나라로 건너가 무령군(武寧軍) 소장(小將)을 지낸 것으로 역사는 말한다.

 

당나라에 건너가 용맹한 장수가 된 장보고, 당시 노략질하는 당의 해적들이 신라인들을 잡아다 노예로 팔거나 무역선을 약탈하는 것을 보며 분노한다고국으로 돌아온 장보고, 당나라의 해적을 막기위해 청해에 군사를 주둔시킬 것을 주청하여 흥덕왕의 허락을 받아 828년 군사를 모아 청해진을 설치하였다

 

다른 군진의 책임자와는 달리 '대사'라는 칭호를 받은 장보고는 당의 해적들을 소탕하고, 신라 일본 당나라 3국의 해상권을 장악한다. 청해진을 본거지로 하여 삼해(三海)의 해상교역에서 신라가 주도권을 장악하면서 장보고의 시대가 열린다힘이 막강한 청해진이 설치되면서 해군력이 집중되고 해상왕은 민간인으로 최초 세계적인 무역왕이 된다. 이렇게 해상무역기지로 번성하는 무역활동은 경제력의 바탕이 되었다.

 

▲ 당시 사용했던 우물, 지금도 이대로 모습으로 보존되고 있다.     ©심명숙

 

장보고는 축적된 부와 권력으로 중앙정부에도 관여하게 된다. 그러나 중앙정부의 권력다툼에 자기 뜻대로 되지 않아 반기를 들자 자객(염장)에게 살해(846 문성와 8)당한다. 그 뒤로 청해진의 무역 활동은 이어졌으나 문성왕 851년에 철폐되면서 청해진 시대가 막을 내렸다지금 생각해도 융성하게 성장한 해상의 진지이자 보루였던 청해진의 운명이 아쉽기만 하다.

 

▲ 장보고가 지휘하던 본진영, 장도 제일 높은 곳에 서있다  © 심명숙

 

청해진 장도에 들어가 보면 아기자기한 비경이다. 바람, 햇살, 구름이 잔잔히 내려앉은 바다에는 김, 전복 양식장들이 동화처럼 그려져 있다. 작은 섬에서 장보고의 눈은 동북아를 한눈에 담았고, 세계를 향해 원대한 꿈을 가슴에 품었던 곳이다나는 먼 옛날의 청사진을 의미 깊게 그려보며, 파란 초여름 토성위로 걸었다. 인근에 장보고가 지었다고 추정하는 법화사 터도 보존 되어있다고 한다.

전남 완도군 완도읍 장좌길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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