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문화재연구소 풍납토성 발굴조사 현장설명회 개최

낙랑 및 고구려계 토기 출토 북방지역과 활발한 교류 이뤄져

이성훈 | 기사입력 2011/11/28 [15:18]

국립문화재연구소 풍납토성 발굴조사 현장설명회 개최

낙랑 및 고구려계 토기 출토 북방지역과 활발한 교류 이뤄져

이성훈 | 입력 : 2011/11/28 [15:18]
문화재청 국립문화재연구소가 29일 오후 2시 서울 풍납토성의 동성벽 발굴조사 현장설명회를 개최한다. 풍납토성(사적 제11호)은 백제 한성(漢城) 시기의 도성으로 성벽의 축조공정과 활용과정을 규명하기 위해 한성백제박물관건립추진단의 의뢰를 받아 지난 4월 20일부터 발굴조사를 진행해왔다.

이번 조사지점에서는 성벽을 쌓기 위해 지반을 강화했던 기초공사구간과 성벽의 규모를 확장했던 순서와 출토 유물 등을 통해 단계별 축조시기 등 증축과정을 확인할 수 있는 성과를 거뒀다.

성벽의 기초공사는 당시의 지표면을 정리하고 너비 11m 구간에 최대 0.9m의 높이로 흙을 쌓아 실시했다. 이 구간에서는 낙랑토기의 제작기술과 관련된 토기 경부암문호(頸部暗文壺)를 비롯해 격자문암키와 등이 출토되어 기원후 3세기 중후반에 공사가 시작되었음을 알 수 있었다.

초축성벽(初築城壁)은 기초공사구간 위에 골조가 되는 토루(土壘 : 성벽 등 흙을 쌓아서 만든 구조물)를 먼저 쌓고 그 안팎으로 다시 흙을 덧대어 쌓아 완성했으며 벽면 보강시설과 내부 배수시설도 설치했다.

성벽의 내부에서는 어깨에 커튼모양의 장식[揮帳文]이 있는 직구단경호가 출토됐는데 고구려 토기의 제작기술과 관련된 것으로 추측된다. 이번 조사지점에서 확인된 성벽의 너비는 37m이며 높이는 최대 9.5m에 달한다.초축성벽은 완성 이후 두 번의 증축을 하였는데 최종 성벽의 총 너비가 43m에 이른다. 

▲ 풍납토성 석축_문화재청  

또한 성벽 내벽에는 성벽과 지표면을 보호하기 위한 석축시설도 남아있었다. 성벽조사에서는 백제시대에 붕괴된 성벽을 보수한 흔적이 발견됐고 토압(土壓)으로 성벽 내부의 일부가 침하된 흔적 등도 확인됐다.

출토된 낙랑 및 고구려계 토기는 풍납토성 축조 당시 백제의 북방지역에서 다양한 물질문화가 유입됐다는 것을 시사해준다. 또 3세기 이후 문헌에 기록된 낙랑 및 고구려와도 교류를 통한 국가간 소통 관련 가능성을 깊게 해주고 있다.


특히 기초공사구간에서 수습된 목재시료의 방사성탄소연대측정(3건) 결과 결합연대(측정된 각 시료의 절대연대들을 통계학적으로 결합한 연대)가 기원후 235~260년 또는 290~325년으로 산출됐다. 이것은 이번 조사지점의 성벽이 3세기부터 4세기를 전후한 시점에 걸쳐 처음 축조됐다는 사실을 뒷받침해준다.

지금까지의 조사에서 확인된 풍납토성의 축조시기 자료를 근거로 하면 성벽의 축조가 당시의 대규모 국가적 토목사업(총 길이 3.5㎞)이었음을 고려해볼 때 공사구간 별 착공 및 완공시점이 서로 다를 수 있다는 가능성을 뒷받침해준다. 앞으로 국립문화재연구소에서는 학술자료의 보강과 학제간 융복합연구 등을 통해 풍납토성의 축조시기 및 성격 등을 지속적으로 연구해 나아갈 계획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