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산 선유도에서 만난 구세주

어둠이 짙게 깔린 산 속에서 길을 잃고 헤메던 그때

김관수 | 기사입력 2012/03/23 [10:25]

군산 선유도에서 만난 구세주

어둠이 짙게 깔린 산 속에서 길을 잃고 헤메던 그때

김관수 | 입력 : 2012/03/23 [10:25]

어느 늦은 여름 가까스로 휴가를 얻었다. 여러가지 문제들로 퇴사를 고려하고 있는 상황에 좋은 분들과의 인연 마저 모두 무너지는 것 같아 마음이 무척 무거운 때 였다. 휴가라는 단어가 무색한 표정으로 군산행 고속버스에 몸을 실었다.

머리털 나고 처음 맡아보는 군산의 공기를 느낄 틈도 없이 여객선 터미널로 이동, 선유도행 페리에 몸을 실었다. ‘신선이 노니는 섬’ 이라는 이름은 나에게 어떤식의 위로든 받을 수 있을거라는 기대감과 궁금증을 동시에 가져다 주고 있었다.
 

▲ 선유도 망주봉   


선유도에서 장자도로, 그리고 장자도에서 대장도로 길은 계속해서 이어진다. 어느새 해가 서서히 넘어가는 시간이 되고 있다. 전날 밤, 인터넷에서 급하게 찾아 본 정보에 따르면 선유 8경이 있는데 그 중 으뜸은 ‘선유 낙조’ 라고 했다.

선유도의 망주봉, 장자도의 선유봉, 대장도의 대장봉, 무녀도의 무녀봉, 이렇게 네개의 섬에는 각각 봉우리가 하나씩 있는데 선유봉과 대장봉의 낙조가 그 중 뛰어나다고 했다. 마음이 조금씩 급해지기 시작한다. 일단 숙소부터 잡고 낙조를 보러 가려고 삼각대와 카메라를 챙기는데 누군가 방문을 두들긴다. 방 청소를 하러 오신 민박집 아드님이다.

사진 찍기에 선유봉과 대장봉 중에 어느 쪽이 더 좋은지, 오르내리기에 어느 쪽이 더 편한지가 여쭤본다. "선유봉 쪽은 길이 좀 더 험해서 초행길에는 쉽지 않을거에요. 어차피 나름대로 포인트가 있어서 어디가 더 낫다고 말씀 드리기도 어렵고... 그냥 안전한 곳으로 가시는게 좋죠."
"아, 그럼 대장봉으로 가야겠네요. 감사합니다!"  
 

▲ 대장봉   


이미 등산로 입구까지 확인했던 대장봉으로 향한다. 해가 어스름하게 내려 앉으려 하지만 멀리서 바라본 대장봉의 높이는 동네 뒷산 수준이다. 부담없이 대장도 마을을 둘러보며 천천히 오르기 시작한다. 등산로 입구를 조금 지나서니 곧 등산로 라고 할 만한 길은 사라지고 사람 한명이 겨우 지나갈만한 좁은 숲길로 이어진다.

길은 점점 난이도가 높아져서 로프를 잡고 올라야 하는 암벽과 같은 자연친화적 코스들도 나타난다.절반쯤 오르자 산 중턱에 떡하니 폐가가 하나 서있다. 폐가 뒤로는 인터넷에서 봤던 장자할머니 바위가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바람난 남편이 소실을 데리고 오는 모습을 보고 서운한 맘에 돌아 앉아 그대로 굳어버렸다는 전설이 깃든 바위다.

폐가 속에는 신의 제단에 바칠만한 왠지 음산스러운 것들이 어지럽게 흩어져 있어 마치 전설의 고향 속 무당집에 들어 온 기분이다. 어떤 설명도 없어 답답하지만 그 기운에 쓸데없이 위축이 되어간다. 덕분에 발걸음은 빨라지고 낙조 분위기가 무르익기 전, 무사히 정상에 올라섰다.
 

▲ 대장봉 정상에서 내려다보는 장자도와 선유도   


그야말로 한폭의 그림이다.
보라빛으로 퇴색하는 하늘과 고깃 비늘 처럼 반짝이는 바다와 띄엄띄엄 흩뿌려진 크고 작은 군도들이 펼쳐졌다. 그 광경은 감히 인간의 힘으로는 만들어낼 수 없는 것이고 난 구름 위에 우뚝 선 손오공이라도 된 것만 같다.

삼각대를 이리저리 옮겨가며 낙조를 가장 완벽하게 담을 수 있는 자리를 잡고 카메라를 삼각대 위에 꽂았다. 셔터는 연사로 눌러지고 삼각대는 360도 돌아간다. 좀 과장하자면 360도의 원 안에 360개의 풍경이 서로 다른 감격으로 다가오고 있다.
 

▲ 대장봉 낙조   


해가 떨어지는 속도에 비례하여 세상은 점점 검붉어져간다. 서서히 서서히 세상은 잠들려 하고 있고 누군가의 품이 몹시도 그리워지고 있다. 카메라를 놓고 삼각대 곁에 주저 앉았다. 두 손을 맞잡고 입술을 살며시 깨물었다. 눈시울이 촉촉해져오고 있다.

크게 소리치고 말았다. 그건 왜 그랬는지 알 수 없는, 어떤 타이밍이었는지 모를만큼 순간적인, 하지만 절대로 잊어서는 안되는 간절한 약속이다. 신선님들께 고하는 나의 묵은 고백이다. 말없이 자취를 감추는 해에게 나를 지켜 달라 절규 하고 있다.
 

▲ 절규하는 나     


해는 수평선 아래로 숨어버렸고 나는 무언가에 홀렸다 깨어난 듯 현실로 돌아왔다. 바다를 뚫고 마지막 여명이 빠르게 숨어들고 있다. 그제서야 해가 사라지면 어둠만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펼 때보다 더 신속하고 민첩하게 삼각대와 카메라를 철거하고 어깨에 둘러멘다.

사방이 휑하게 열린 정상에서 다시 사방이 어둠의 숲으로 둘러쌓인 좁은 길로 들어선다. '조금의 빛이라도 있을 때 최대한 많은 길을 가야한다!' 내가 가진 빛이라곤 주머니 속 싸구려 라이터가 전부다. 얼마쯤 내려가자 눈 앞의 시야와 머리 속이 동시에 완벽하게 어두워졌다. 그만 길을 잘못 들고 만 것이다. 전혀 기억에 없는 곳에 홀로 서있다. 오던길을 따라 한발자욱을 더 내딛으면 암벽이 시작된다.

아까는 보지 못했던 암벽이...
'다른 길은 없다. 오로지 GO! 못먹어도 고!'
용기를 내 한발 한발 디뎌보지만 미끌미끌 암벽이 계속 될 뿐이다. 이제 잘 보이지도 않는 암벽길을 엉금엉금 기다싶이 내려가 본다. 결국 몇 걸음 못가서 낭떠러지 절벽 앞에 섰다. 단지 막막함 뿐이다. 어둠도, 절벽도...

머리 속은 온갖 방법을 떠올리느라 정신없다. 아무래도 어딘가에 구조 요청이라도 해야할 것 같다. '선유도에 119 구조대는 있을까? 아니 하다못해 파출소라도 있을까? 선유도에 119 구조대가 없으면 바다 건너 군산에서 와야 하는게 아닐까? 그들이 이 밤에 여기까지 올 수 있을까?' 휴…

'여기서 미친듯이 소리를 지르면 저 아래 대장도 주민들이 내 목소리를 들을 수 있을까? 마을에 과연 사람들이 있기는 할까? 이 곳에 오르기 전 내가 본 사람은 민박집 주인분들이 전부였던 것 같은데…'
마음을 가라앉히고 다시 정상으로 돌아가 본다. 그 곳부터 다시 내려가며 올라왔던 길을 기억해내는게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일 것 같다. 사실 그 방법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이번에는 앞,뒤,좌,우 사방을 꼼꼼하게 살피며 다시 내려간다. 신경을 최대한 곤두세워 네비게이션의 GPS 가 되어야 한다. 그게 내가 살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길이 다시금 낯설어지려 할 때 어디선가 알 수 없는 소리가 들려온다.
‘뭐지?’
‘음메에에~’
‘염소 소리?’
‘음메에에~’
‘산 꼭대기에 왠 염소?’
들려오는 소리의 크기로 봐서 분명 근처에 있는 것 같다. 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방향을 틀어 그쪽으로 갈수 있는 길을 찾는다.

바로 그 때!
신기한 일이 어둠을 뚫고 벌어졌다. 분명 아까 지나쳤던 길인데 하나라고 생각했던 길이 둘로 갈라져 있는 게 아닌가! 새로운 길은 바로 염소 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나있다. 상기된 마음으로 그 길을 헤치고 나간다. 어둠을 지나 희미한 불빛이 보이기 시작한다. 그 빛이 보이는 곳을 향해 서둘러 다가가다가 그만 ‘엇!’ 하고 멈춰 섰다.

분명 염소 한마리가 날 바라보며 서있다. ‘정말?’
나도 모르게 염소가 있던 자리로 급히 다가간다. 이미 염소가 무서울지도 모른다는 생각 같은건 할 수 없는 상황이다. 그리고 염소와 서로가 느끼는 최소한의 안전 거리에 섰다. "와아! 아까 그 길이다!"

내가 삐질삐질 땀을 흘리며 급히 오르던 그 길이 거기 아무렇지않게 있다. 염소는 날 보더니 유유히 달아난다. 마치 그 모습은 이제 안심했다는 듯 돌아가는 그런 모습이다. 부지런히 산을 내려와 대장도에 서서 어둠만이 가득한 대장봉의 하늘을 바라본다.

염소의 마지막 뒷 모습이 잊혀지지가 않는다. 참 바보 같다는 생각이 든다. 염소의 뒷 모습에 진심으로 큰 절 한번은 했어야 했다. 난 너무 이기적인 동물이었다.
 

▲ 안식과 평화가 공존하는 곳   


난 선유도에서 진짜 신선을 만났다.
평생 잊지 못할 염소의 구원,
그건 나에게 언제까지나 전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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