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트레블뉴스=심명숙 기자] 충청남도 기념물 제75호. 홍성군 결성면 성곡리 491번지를 찾아가 본다. 시골의 한적한 길을 조금 걷다 보면 어깨에 푸른 망토처럼 소나무 동산을 두른 작은 초가집이 고요하다. 초여름 초록에 묻힌 뻐꾸기 울음이 빛난다.
과거의 문학사상, 독립운동사상이 마룻바닥에 고스란히 깔려있고, 처마 밑에는 깐깐하게 마른 그의 철학이 새끼줄에 설렁설렁 묶여있다. 그 집에는 어릴 적 꾸던 꿈이 호송되어 있다. 살금살금 안으로 들어서며 혹시 안에서 기침소리 나오지 않을까 괜한 조바심이다.
정겨운 초가집은 일자형 구조로 툇마루위에 ‘님의 침묵’이 초연하게 걸려있다. 감상에 빠져든다. 고서(古書)를 쌓아 놓은 듯 한 댓돌을 딛고 올라섰다. 찌릿한 햇살가닥이 ‘날카로운 첫 키스의 추억은 나의 운명의 지침(指針)을 돌려놓고 뒷걸음쳐서 사라졌던’ 키스가 다시 돌아와 가슴에 꽂힌다. 마루 끝에 바람이 펼쳐놓은 만해의 지침서(방명록)에 이름과 날짜를 힘주어 쓰고, 마루에 걸터앉았다. 저만치서 누군가가 님을 찾아오고 있다.
▲ 만해 선생 안방, 방안에는 자그마한 앉은뱅이 책상이 앉아있다. © 심명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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풋풋하게 정겨운 뒤꼍에는 나지막한 굴뚝이 촌스럽게 서 있다. 뒤뜰을 돌아 나와 우물을 들여다보면 푸른 추억이 가득 차있다. 우물가 장독대에 앉았던 노랑나비 인기척에 놀라 날아가 싸리 울타리에 앉는다. 문이 열려있는 방안에는 한학(漢學)의 인의예지(仁義禮智) 여운이 젖어있는 앉은뱅이 책상위에 만해 선생의 사진이 걸려있다. 마음이 따뜻하다.
부엌 황토 부뚜막 위에 검정 가마솥이 너그럽게 앉아있고, 시렁에는 하얀 사발이 수줍은 듯 배를 감추고 엎어져 있다. 사랑방 옆에 작은 헛간에는 절구통과 맷돌, 장작을 층층으로 쌓아놓았다. 주인 없이 조용히 침묵하고 있는 뿌리 깊은 나무들, 금방이라도 드넓은 광야로 뛰어 나갈 듯이 푸르다.
‘만해 한용운’님을 생각하며 초여름 빛이 푸르른 날에 푸른 뜰을 걷는다. ‘님은 갔습니다. 아아 사랑하는 나의 님은 갔습니다. 푸른 산 빛을 깨치고 단풍나무 숲을 향하여 난 적은 길을 걸어서 차마 떨치고 갔습니다.’ 이렇게 떠나버린 만해선생이 살던 초가집은 소실(消失)되고, 1992년 그 자리에 복원했다고 한다.
▲ 생가 앞뜰에 서 있는 만해 동상. © 심명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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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9년 8월에 태어난 ‘만해 한용운(韓龍雲)’ 본명 한정옥(韓貞玉) 승려이자 독립운동 가이다. 부농인 아버지 한응준(韓應俊)과 어머니 창성 방씨(昌成 方氏)의 두 아들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어릴 적 고향에서 한학을 배웠고, 18세 때인 1896년(또는 1897년) 고향을 떠나 백담사 등을 돌아다니며, 1896년 동학 운동에 실패하자, 설악산 오세암에 들어가 불교 공부를 하였다고 한다.
1910년에 국권을 빼앗기자 중국, 만주와 시베리아 등지를 방랑하다가 1913년 귀국해 학원에서 불교를 가르쳤다.
이후 ‘1912년 양산 통도사에서 팔만대장경을 열람하고 1914년 부산 범어사에서『불교대전(佛敎大典)』을 간행하고, 대승불교의 반야사상(般若思想)에 입각하여 종래의 무능한 불교를 개혁하고 불교의 현실 참여를 주장하였다.’『불교대전』은 대중들에게 어려운 불교를 쉽게 알릴 수 있도록 팔만대장경의 핵심 부분만 뽑아내어 간행하였다고 한다.
또한, 독립운동가 한용운선생은 1919년 3.1운동 민족 대표 33인 중 한 사람으로 〈독립선언서〉에 선언하고 자진 체포되었다. 3년 복역을 마치고 나와, 민족의식 계몽에 대한 준비를 한 후, 시집 『님의 침묵』을 출간한다. 누구나 알고 있는 〈님의 침묵〉이라는 시는 대부분 교과서에서 배우기 시작했다.
1926년에 발표된 만해의 대표작 〈님의 침묵〉은 저항 시로, ‘님’은 일제강점기에 주권을 빼앗긴 나라를 의미한다. 표현의 자유를 억압받던 답답함은 조국을 ‘님’으로 상징적 표현을 했다. 그토록 억울한 심정은 모든 민족운동이나 독립운동에 앞장섰다.
당시 일제의 회유와 협박으로 많은 지식인들이 친일파로 변절을 했다. 하지만 한용운은 그 의지가 꺾이지 않고 나이가 들어서도 저항의 힘은 단단했다고 한다. 만해선생은 일제강점기에 불교사상과 조국을 생각하는 독립운동가의 심정을 작품들로 남기고, 1944년 광복을 불과 1년 남기고 향년 65세로 입적했다.
▲ 만해 생가 우물에는 여전히 물이 마르지 않고 있다. © 심명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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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해 한용운선생 생가지 홍성군 결성면 성곡리에 가면, 만해 문학 체험과, 솔밭에 민족 시비공원, 까치소리가 푸르디푸르게 ‘제 곡조를 못 이기는 사랑의 노래는 님의 침묵을 휩싸고 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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