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의 스위스 여행자들

수 세기 동안 스위스를 여행한다는 것은 단순히 이 곳에서

이성훈 | 기사입력 2014/03/09 [10:33]

최초의 스위스 여행자들

수 세기 동안 스위스를 여행한다는 것은 단순히 이 곳에서

이성훈 | 입력 : 2014/03/09 [10:33]
오늘날 여행자들이 보는 스위스는 사실, 시적인 발명에 가깝다. 수 세기 동안 스위스를 여행한다는 것은 단순히 이 곳에서 저 곳으로 향하기 위해 스위스를 지나는 것에 불과했다. 지금은 스위스의 절경으로 꼽히는 심플론(Simplon), 장크트 고타르드(St. Gothard), 상 베르나르(St. Bernard)나 오싹한 슈프뤼겐(Splügen) 등의 알프스 고개들은 북유럽과 남유럽을 잇는 가장 빠른 길이었다.

물론, 가장 쉬운 길과는 거리가 먼 얘기다. 과거의 편지와 일기에서 종종 드러나듯 감상 보다는 두려움의 존재였으며, 여행자들은 줄곧 이 끔찍한 일이 끝났음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곤 했다.

▲ Gueggisgrat   

산 안개와 몰려드는 비구름, 성난 급류, 눈사태, 낙석, 늑대, 곰, 노상강도에 대한 두려움에 떨며 알프스로의 여행을 이어 나갔다. 경치에 눈을 돌린 이들은 몇 되지 않는다. 뒤러(Dürer), 홀바인(Holbein), 브뤼겔(Breughel) 등이 이탈리아로 향하는 길에 본 스위스를 화폭에 담았지만 알프스 산이 아닌, 들판이나 호수의 풍경이었다.

에라스무스(Erasmus)처럼 그들 역시, 뾰족한 알프스 봉우리와 숲이 가득한 산은 풍경에 매력을 더하는 존재에 불과했던 것이다.


그러다 줄리어스 시저(Julius Caesar)가 옛 스위스, 헬베티아(Helvetia)를 정복한 뒤로 알프스 온천에 치료를 목적으로 사람들이 찾아들기 시작했다. 수 세기 후, 몽테뉴(Montaigne)는 지극히 개인적인 경험을 토대로 알프스 온천의 효과에 대해 극찬을 하기도 했다. 이 당시 역시 대부분의 여행자는 건강을 위한 목적으로 스위스를 찾았다.

18세기에는 스위스를 지나던 한 독일 학생이 필라투스(Pilatus) 산에 올라 풍경을 감상하다가 알프스 산봉우리가 경치를 다 가렸다고 불평하기까지 했다는 일화가 있다. 이성시대에는 산과 같은 기이한 존재는 무시하는 경향이 강한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그러나, 과학자들은 예외였다.

그들은 산을 하늘이 내려준 곳으로 여겼다. 지구에 대해 정확한 정보를 제공해 주는 식물, 돌, 크리스탈, 화석 등을 채집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오라스 베네딕트 드 소쉬르(Horace-Bénédict de Saussure)를 비롯한 과학자들은 기록과 측정을 목적으로 깨지기 십상이고 거추장스러운 기압계와 습도계를 짊어지고 점점 더 높은 곳을 향해 나아갔다.

▲ Montreux_Chillon  

1786년 소쉬르는 최초로 몽 블랑(Mont Blanc_프랑스)에 오르는 길을 최초로 닦은 이에게 후한 상금을 치르고, 다음해 직접 몽 블랑 정상에 올랐다. 과학자들이 이렇게 알프스에서 자연을 관찰하는 동안, 시인과 철학자들도 마침내 그 드라마틱한 장관에 눈을 뜨기 시작했다.

알프스의 풍경은 괴테에게 큰 인상을 주었는데, 이 이야기를 들은 쉴러(Schiller)가 스위스의 건국 영웅인 빌헬름 텔(Wilhelm Tell)에 대한 희곡을 쓰게 된다. 나폴레옹 전쟁 당시 영국인들이 유럽 대륙을 여행하는 것이 중단 되었다가 1802년 아미엥 조약(Treaty of Amiens)으로 잠시 여행 제약이 풀리자, 터너(Turner)는 스위스를 여행하면서 400여점의 스케치를 하기도 했다. 이후 작품의 기반이 되어 주었는데, 이 작품들이 러스킨(Ruskin)을 무척 매료시켰다고 전해진다.


이제 더 많은 관광객들이 생겨나고 그들은 빙하와 만년설, 급류와 폭포를 보며 의무적으로 자연의 신성함을 감상하거나 웅장함을 감상하게 되었다. 오, 자연이 주는 이런 매력과 저런 매력이 심금을 울리는구나.하는 시대가 온 것이다.

제네바(Geneva)에서 만난 두 유명한 영국 시인으로 인해 스위스는 더욱 유명해지게 된다. 로드 바이런(Lord Byron)이 루소(Rousseau), 볼테르(Voltaire), 기본(Gibbon)의 발자취를 따르며 스위스로 문학 순례를 떠났을 때의 일이다. 루소가 그의 저서, 누벨 엘로이즈(Nouvelle Héloïse)에서 묘사한 곳들을 둘러보고자 할 때, 셸리(Shelley) 역시 그의 가슴 속 주머니 속에 같은 책 한 권을 품고 있었다.

이 두 시인은 제네바에서 배를 타고, 함께 레만(Léman) 호 투어에 나선다. 멜레리(Meillerie)와 상장골프(St-Gingolph) 사이, 갑작스런 돌풍으로 배가 거의 뒤집힐 지경이었다. 수영을 못하는 셸리는 두 팔을 감싸안고 물에 빠질 채비를 하고 있었고, 수영에 자신이 있던 바이런은 코트를 벗고 친구를 구하러 나설 참이었다. 다행히 거대한 물살에도 불과하고 선장의 노련한 기술로 두 시인은 시옹(Chillon) 성에 무사히 다다른다.

▲ Montreux_Chillon   

시옹성에서 자유 사상가였던 두 시인은 수감자들이 수년동안 묶여 있던 쇠로된 고리가 여전히 남아있는 일곱개의 화강암 기둥이 있는 감옥에 분개한다. 시옹의 죄수(The Prisoner of Chillon)이라는 시는 바이런이 그칠 줄 모르고 이틀간 비가 내리던 로잔(Lausanne)의 여인숙, 오베르쥬 드 랑크르(Auberge de lAncre)의 18호실에서 급히 휘갈겨 써 런던의 편집자에게 보낸 것이다.

이 두 시인은 수 주간 함께 여행을 하며 창작의 열의로 넘치는 흥분된 토론을 하며 여러 글을 썼는데, 시옹의 죄수가 그 중 첫 작품이었다. 바이런은 로잔에서 문학 순례를 계속하며 기본이 쇠퇴와 타락(Decline and Fall)의 마지막 부분을 집필했던 테라스에서 아카시아 가지를 꺾기도 했다.

▲ Pilatus  

몇 주 후에 바이런은 말을 타고 베르네제 오버란트(Bernese Oberland)를 지나 아이거(Eiger), 묀히(Mönch), 융프라우(Jungrau) 봉우리 발치에서 웅장한 봉우리들을 바라보며, 진실과 같이 빛나는 장관의 봉우리와 천국에서 눈 덩이로 악마를 공격하는 눈사태의 소리에 감명을 받기도 했다.  

퍼시 셸리는 그의 부인, 매리를 데리고 샤모니(Chamonix_프랑스)에 있는 메르 드 글라스(Mer de Glace)로 여행을 떠난다. 그 곳에서 그의 이상적인 시, Ode to Intellectual Beauty의 시작부분을 집필한다. 그의 옆을 조용히 따르던 매리는 황량한 빙하 풍경을 기록한다. 그녀가 쓰고 있던 작은 이야기의 배경이 되는 풍경으로 사용할 작정이었다.

그것이 바로, 이들에 제네바에서 다시 만나며 세상을 깜짝 놀라게 만든 이야기, 프랑켄슈타인(Frankenstein)의 기초가 되어 준다. 이 두 시인이 묘사한 풍경을 직접 감상하고자, 사람들은 이들의 발자취를 따라 여행길에 나서기 시작했고, 스위스의 관광은 점차 발전하게 되었다. 참고자료_Petit Guide de la Suisse insolite/Made in Switzerland, Mavis Guinard, Metropolis / 스위스 정부관광청_사진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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