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위스는 어떻게 깨끗해졌을까

눈처럼 새하얀 침구에 대해 침이 마르지 않게 떠들어

박미경 | 기사입력 2014/10/13 [07:18]

스위스는 어떻게 깨끗해졌을까

눈처럼 새하얀 침구에 대해 침이 마르지 않게 떠들어

박미경 | 입력 : 2014/10/13 [07:18]

초컬릿과 뻐꾸기 시계 외에도 스위스는 깨끗한 곳으로 유명하다. 관광객들은 스위스의 눈 덮인 빙하만큼이나 눈처럼 새하얀 침구에 대해 침이 마르지 않게 떠들어 댄다. 봄맞이 대청소는 연중 이뤄지는 듯 하다. 주부들은 창문마다 베개와 이불을 널어 놓는다. 일요예배용 옷과 스키복이 월요일의 발코니에서 보송하게 마르고 있다.

제네바(Geneva)이든 취리히(Zurich)든 어디서나 새벽 5시이면 어김없이 오렌지색 청소차가 나타나 첫 스위스 은행 직원이 잠에서 깨기도 전에 보도블럭을 치우는데 여념이 없다. 로잔(Lausanne)에서는 매해 노동절이 되면 행진을 하는 노동자들과 붉은 배너를 따라 탱크만한 청소차가 퍼레이드를 바싹 좇으며 일주일에 두 번 열리는 장터 뒤 배추잎을 쓸어 담듯 그들이 남기고 간 흔적을 치우는데 열심이다.

▲ Leukerbad   

 

항상 이랬던 것은 아니다. 19세기 중반까지만해도 스위스는 다른 유럽 국가만큼 더러운 곳이없다. 그 말은 꽤나 더러웠다는 얘기다. 초기 기독교 윤리, 그리고 미개인들의 침략이 이어지며 로마의 목욕 문화도 사라졌다. 중세에는 한 동안 터키탕이 십자군들에 의해 다시 부활하기도 하고, 공중 목욕탕이 생기기도 하고, 엄격한 수도원 규정이 새로운 기준을 만들기도 했다.

하지만 이런 몸에 대한 과도한 기준은 종교 개혁 집단은 물론 그 반대파에게서도 맹렬한 비판을 쏟아내게 만들었다. 매독에 대한 두려움은 마지막 남은 목욕탕의 온기마저 꺼트려 버렸다. 루이 14세는 베르사이유 궁전의 분수에는 물이 흘러 넘치게 만들면서도 자신의 몸에는 거의 물을 대지 않았다. 물이 땀구멍을 열어 흑사병같은 전염병이 몸속으로 들어가게 만들거라는 두려움 때문이었고, 대부분의 유럽 사람들은 얼마만큼의 먼지가 오히려 몸을 보호해준다고 믿었다.

스위스를 깨끗하게 만든 것은 관광에 대한 압박감과 전염병에 대한 두려움이 합쳐진 데서 기인한다. 1980년대에 보(Vaud) 주의 청결에 대해 230 페이지에 달하는 관련 증거로 가득한 논문을 쓴 사회학자 쥬니비에브 엘러(Geneviève Heller)는 청결에 대한 갈망이 보주의 훌륭한 지형을 발견하고 곧 강박적이 되었다고 얘기하고 있다.

 

▲ StMoritz    



먼저 관광객들이다. 독어권 지역이나 잘 알려진 관광지에서는 잘 꾸며진 숙소들이 대부분 깨끗했지만, 잘 알려지지 않은 곳은 사정이 달랐다. 머레이(Murray)의 1838년 스위스 여행자를 위한 핸드북(Handbook for Travellers in Switzerland)에서는 농부들이 우유통은 깨끗히 관리하지만 산속 샬레에서 묵어 가고자 하는 경우, 더럽거나 벌레가 득실댈지도 모른다고 경고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좋은 전망에 자리한 샬레 중 일부는 19세기 후반에 이르러서는 럭셔리한 호텔로 거듭나기도 했다.

바이런(Byron)이나 러스킨(Ruskin)과 같이 도도하고 까다로운 신사들의 가르침을 통해 스위스의 숙박업소 주인들은 노새의 등에서 금속으로 된 목욕통을 내리거나 도착하는 즉시 따뜻한 목욕물을 요구하는 일쯤이야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고객의 요구를 맞추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빳빳이 풀을 먹인 앞치마를 두른 어린 아가씨들이 무거운 주전자를 나르기에 여념이 없었다.

프랑스인들이 음식에 집착하는 것만큼이나 영국 관광객들은 티끌 하나 없는 침구 및 식탁보에 집착했다. 세탁부대가 나서 가까운 냇물이나 호숫가에서 침구와 식탁보를 빨아댔다. 1878년 에디슨이 전구를 발견한 뒤, 4년이 지나 브베이(Vevey)나 몽트뢰(Montreux)와 같은 리조트의 호텔들이 전기와 엘리베이터를 이용한다고 광고를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때 즈음에는 많은 호텔들이 영국에서 목욕탕을 수입한 뒤였다.

▲ Zurich   



19세기 말이 되어 전염병에 대한 두려움이 증폭되자 스위스는 청결과 알프스의 깨끗한 이미지를 부각시키기 시작했다. 파스퇴르가 세균을 발견한 뒤로, 부유층은 감염에 대해 걱정하기 시작했다. 치명적인 콜레라, 장티푸스를 비롯한 전염병이 다른 식민지의 배를 통해 유입되었고, 19세기 전반에 걸쳐 유럽 전역을 몇 차례나 휩쓸었다. 그러면서 사람들은 대도시로 이주를 했고, 빈민가가 생겨났다. 공공의 건강을 위해 의사들은 화장실, 배수구, 하수구가 새어나가 식수를 오염시키지 않도록 하자는 운동을 펼쳤다. 서서히 주거지 청결에 대한 법규들이 생겨나고 황폐한 공공주택은 철거되었다.

자선가들이 대중을 청결히 하는 데 앞장섰다. 찰스 디킨스의 가까운 친구이자 런던에서 태어난 스위스인 윌리암 할디만드(William Haldimand)는 은행가였는데, 1844년 그의 재산 중 일부를 기부해 로잔에 시각 장애인들을 위한 시설과 장애인을 위한 시설들을 세웠다. 더러운 생활 환경으로 인해 끔찍한 질병에 노출될 가능성이 많은 이들이라 여긴 것이다. 로잔에 최초의 대중 목욕탕을 만들기도 했다. 전체 도시에 10개의 목욕탕이 적게 들릴 수 있지만, 당시에는 충분했다.

세상을 안전한 곳으로 만들기 위해 저소득층에게 목욕하는 법을 가르치는 것이 중요했다. 대부분의 스위스 지역에서는 어린 학생들과 군인들을 통해 교육이 이루어졌다. 1890년부터 제 1차 세계대전까지 학교 건물이 생길 때마다 공중 샤워실도 함께 갖추었다. 일주일에 한 번씩 학생들은 단체 샤워를 했다. 학생들의 샤워가 끝나면 교사들의 차례였다. 마지막 샤워는 찬물밖에 안나오기 일쑤였다.

천물이 좋다는 아이디어는 실레시아(Silesia) 지역에서 기원했다. 찬물 목욕, 찬 우유, 호밀빵은 확신에 찬 환자들에게 기적을 가져왔다. 반면 스위스에서는 따뜻한 물이 좋다는 아이디어가 대세였다. 바덴(Baden), 로에슈(Loèche), 생모리츠(St. Moritz)의 온전은 이미 로매인들에게 잘 알려진 곳이었고, 치료와 휴양을 목적으로 이미 많은 관광객들을 유치하고 있던 터였다. 호텔의 게스트 북에는 러시아의 공작들을 비롯해 유명한 예술가와 작가들의 이름이 남겨져 있기도 했다. 고도가 좋다는 아이디어는 의사들이 알프스 고지대의 깨끗한 공기가 폐결핵 환자들에게 좋다는 사실을 발견하면서 ‘마법의 산’으로 향하는 이들이 점차 많아졌다.

이렇게 청결의 중요성이 대두되면서 주부들도 바빠졌다. 청결이 주부의 가장 중요한 덕목이 되어버린 것이다. 남편을 술집에서, 그리고 아이들을 길바닥에서 멀리하기 위해 여자들의 역할은 집을 깨끗하고 찾고 싶은 곳으로 만드는 것이 되었다. 빗자루를 들고 있는 손이 온갖 사회악을 멀리하게 만들 것처럼 말이다. 심지어 ‘가정학’이라는 학문까지 생겨 스위스의 많은 지역에서 여학생들이 학교를 졸업하기 전에 반드시 수강해야 하는 과목이 되었다.

스위스 여자들이 반기를 들었다. 1971년 투표권을 획득하고 10년뒤 무차별권을 획득하며 집안 청소를 장려하는 것은 여자를 집안 바보로 만드는 것이라 주장했다. 남학생들이 과학과 수학을 배울 동안 여학생들이 가정학을 배워야 하는 것에도 시위를 벌였다. 결국 요리와 가정학이 학교 교과정에 남기는 했지만 남학생도 들을 수 있는 과목이 되었다.

그리고 더 많은 여성들이 직업을 갖게 되었고, 집안을 쓸고 닦는데 더 이상 집착하지 않게 되었다. 최근에 이루어진 스위스 젊은 커플들을 대상으로한 설문 조사를 보면, 집안일은 나눠서 하는 경향을 발견할 수 있었다.
19세기에는 청결을 위한 전쟁에서 스위스가 승리를 거두었지만, 현재는 자연을 보호하는 새로운 싸움이 이어지고 있다. ‘하얀색 보다 더 하얗게’라는 취지는 없어진지 오래다. 독성 성분이 있는 청소용품과 세척제는 호수와 냇물을 오염시킨다. 자연보호는 집에서부터 이루어져야 한다는 운동이 펼쳐지고 있다. 스위스 정부관광청_사진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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